아름다운 시

[스크랩] 그럴 수 없다 / 류시화

라인 빌 2020. 4. 23. 07:02

 

 


♣그럴 수 없다 / 류 시화  ♣

 
물 속을 들여다보면
물은 내게 무(無)가 되라 한다.
허공을 올려다보면
허공은 또 내게 무심(無心)이 되라 한다.
허공을 나는 새는
그저 자취없음이 되라 한다.

그러나 나는
무(無)가 될 수 없다.
무심(無心)이 될 수 없다.
어느 곳을 가나 내 흔적은 남고.

그는 내게 피 없는 심장이 되라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는 도둑처럼 밤중에 이슬을 밟고 와서
나더러 옷을 벗으라 하고
내 머리를 바치라 한다.
나더러 나를 버리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는 내게 물이 되라 하나
나는 불로서 타오르려 한다.
그는 내게 미소가 되라 하지만
그러나 아직 내 안에 큰 울음이 넘쳐난다.
그는 내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라 하나
나는 그럴 수 없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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