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근담(菜根譚)-인생의 후반(後半)이 중요하다
聲妓 晩景從良 一世之胭花無碍
성기 만경종량 일세지연화무애
貞婦 白頭失守 半生之淸苦俱非
정부 백두실수 반생지청고구비
語云 看人 只看後半截 眞名言也
어운 간인 지간후반절 진명언야
노래하는 기생이라도
늘그막에 한 남편을 따르면
한세상의 분과 연지도
꺼릴 게 없고,
수절하던 부인이더라도
백발이 된 후에 정절을 잃고 보면
한평생의 맑은 고절(苦節)의
보람이 헛되게 된다.
속담에,
"사람을 보려거든 후반생을 보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라 하겠다.
[해설]
시작은 거창하나 결과가 나쁘다면
이는 시작을 안하니만 못하다.
그러나 의외로 이런 경우는 많고
이처럼 용두사미(龍頭蛇尾) 격인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이와는 반대로 시작은 보잘것 없었으나
마무리가 좋은 경우도 있다.
초지일관(初志一貫)의 경우 말이다.
"그 사람을 평하려거든 관(棺) 뚜껑을 덮고 하라 -
蓋棺事方正(개관사방정)"란 말도 있는데,
일은 결과를 놓고 평하고
사람은 후반생을 보고
평하라는 말은 진리이다.
연소(年少)할 때의 실수는 누구나 있게 마련이어서
족히 따질 일이 못된다.
그러나 만절(晩節)이 어긋나면 평생의 명성이나
지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젊은 시절에는 정의를 위해 앞장섰던
분들이 만년의 지조를 지키지 못해 오명을 남기는 예는 흔하지 않다.
그런 사람은 평생 동안 수절을 하다가
늦바람이 나 실절(失節)한 부인만도 못하다.
조선 태조(太祖)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권근(權近)은
문명(文名)과 절의(節義)가 정몽주 이색 등과
나란히 하여 고려 말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
고려가 망하자 다른 신하들과 함께 조선을
섬기지 않고 절의를 지키기로 했다.
그런데 태조가 그의 아버지
권희(權僖)를 졸라 권근의 아들 규(跬)를 경안
공주(慶安公主)와 혼인을
시키려고 부르도록 하였다.
권근은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어 한강
가까이까지 와 맴돌다
마침내 설득을 당해 조선 왕조 창업에
협력을 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권근의 벼슬은 점점 올랐으나
청명(淸名)을 잃어 오늘날까지 한 점 티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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